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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본문

책/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꽁운 2016.11.30 00:23

 평소 일본 작가들의 책들을 즐겨 읽는 편인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작가들 중 한 명인 오가와 요코의 책이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가와 요코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을 잘 쓰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런 특징이 이 책의 제목과는 맞지 않아보였다. 수식이라는 것은 수학과 관련이 있기에 작가의 성향이나 책의 내용에 맞지 않는 메마른 느낌을 주는 단어였다. 그래서 지루한 느낌을 받았지만, 오가와 요코가 이런 느낌의 책을 쓰는 것은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느낌은 역시 남달랐다.

 


 이 책에는 박사라는 특이한 캐릭터가 한 명 등장한다. 그는 기억이 80분마다 리셋 되는 병을 앓고 있었다. 마치 비디오테이프처럼 정해진 80분을 지나면 그 80분 동안 가지고 있던 기억은 없어지고 새로운 80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박사를 보살펴주는 파출부라는 주인공의 설정도 특이하게 느껴졌다. 박사는 뛰어난 수학자로, 80분마다 기억이 리셋 될 때마다 파출부에게 몸무게나 발 치수 등을 물어본다. 그리고 그 숫자들을 우애수쌍둥이 소수와 같은 수학적 용어와 연관 지으며 그것으로 파출부를 기억한다. 박사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몸에 메모지들을 붙이고 산다는 것이다. 그 메모지에 자신의 중요한 기억들을 적어놓고 기억이 리셋 될 때마다 그것을 보고 기억을 되살린다. 이를테면 내 기억은 80분만 지속 된다라는 글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적어놓는 것이다. 또 다른 메모지에는 파출부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녀를 볼 때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박사의 그런 노력도 대단하고, 그런 박사에 맞춰서 생활하는 파출부도 끈기 있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파출부의 역할은 박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이다. 박사의 끊겨버린 기억을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나눌 때, 파출부는 80분 동안이라도 박사의 과거 기억들을 찾아내고 그와 수다를 떨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파출부가 박사의 오래된 야구 카드들을 찾았을 때, 그녀는 박사의 옛 기억들을 찾은 셈이 되는 것이며, 함께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통해 박사에게 과거 기억을 퍼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출부와 그녀의 아들 루트의 노력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게 된다.


  책을 보면 수학적인 문장들이 많이 나온다. ‘220284는 우애수와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220은 파출부의 생일이고 284는 박사가 수상했던 학장상의 번호이다. 이 문장만 보면 지루하고 어려운 느낌을 주지만 이 책 안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표현이었다. 박사는 이렇듯 남과 자신의 관계를 어떤 수학적인 관계로 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식은 박사의 언어라는 이야기가 된다. 우애수 뿐만 아니라 쌍둥이 소수와 같은 수식도 나온다. 쌍둥이 소수는 연속되는 소수의 차가 2인 수를 말하는데, (3,5), (5,7)과 같은 것을 말한다. 아주 간단한 내용이지만 이런 수식들은 수학시간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 속에 이런 수식들이 녹아있으니 이해도 잘 되고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빠지게 된 이유가 또 있다. 요가와 요코의 책들이 그렇듯이 항상 품격 있고 아름다운 문체가 담겨있는데, 특히 이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는 그러한 문체가 더 잘 스며있었다. ‘신의 수첩에만 기록돼 있는 진리를 한 줄씩 베껴 쓰는 것이나 다름없지라는 문장이 있었다. 오가와 요코는 수학자들이 수학 공식을 발견하는 것을 신의 수첩에서 베껴 쓴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숫자를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고 하는 이 표현에서 숫자를 탐구하는 박사의 자세뿐만 아니라 신선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두 사람의 발치에는 수식으로 짠 레이스가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라는 문장도 참 예뻤다. 박사가 수식들을 적어 가르쳐주는 것을 레이스가 무늬를 그리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야기 속의 수식들을 더 친근하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이런 표현들을 읽을 때마다 박사의 수식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소설들이 담고 있는 소설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잔잔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는 박사와 파출부의 관계가 아버지와 딸처럼 설정되어 그러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책이 끝날 때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박사가 아이들에게 주는 헌신적인 사랑의 이유였다. 박사는 파출부와 함께 지내는 내내 그녀의 아들인 루트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고 식사 예절조차 루트에게 맞춰주었다. 심지어 날라 온 야구공을 루트 대신 맞는 박사의 모습을 보고 그가 지나치게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단순히 그가 사람들과 애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식인 오일러 공식의 뜻을 생각해보았다. 오일러 공식 중 eπi + 1 = 0의 뜻을 찾아보니 규칙과 끝이 없는 초월수인 eπ에 가상의 수인 허수 i로 이루어진 수에 1을 더했을 때 0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박사는 파출부가 저녁 준비를 할 때 0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0은 무의 존재가 아닌, 존재하는 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말을 종종 하였다. 오일러의 공식에 따라서 이를 정리해보면 사람의 마음은 결국 존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박사와 파출부가 서로의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작가가 이 애틋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는 결국 이 수식을 마지막으로 파출부와 루트를 잊어버리게 되었지만, 파출부와 루트, 그리고 나에게는 이 수식이 영원히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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